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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속에만 살아계신 5학년 2반 선생님..

일상다반사/개인적인 일상

by 멀티라이프 2009. 5. 15.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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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은 스승의날 이다. 나는 지금도 스승님을 모시고 있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지금 대학원까지 수많은 스승님과 만남과 헤어짐을 가졌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분이 한분 계신다. 지금 내 마음속에만 살아계신건 ,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울산의 약사초등학교에서 5학년이 되던 1993년의 어느날, 새 학년이 시작되고 2반임을 확인한 나는 5학년 2반 교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학생들이 앉아서 떠들고 있었고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보이고 있었다. 그 때 우리의 담임 선생님으로 보이는 엄청나게 마른체구의 한분이 들어오셨다. 사실 선생님의 첫 인상은 매우 좋지 않았었다. 볼품 없어 보이는 모습 때문이었을까, 너무나 말랐던 체구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대부분의 그 당시 학생들이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새로운 학년을 시작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그러나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선생님의 사랑이라고 생각이 든다. 예나 지금이나 성적이 강조되는 학교생활, 다른 반의 선생님들이 성적으로 학생들을 야단칠 때 우리 선생님은 우리를 성적으로 묶어 둘려고 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다 보니 우리 반은 항상 꼴등을 했고, 선생님이 윗분들한테 많이 불려 다니셨던 사실을 한참 후에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선생님이 성적으로 우리를 야단치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님이 나의 가슴속 깊숙이 남아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선생님은 초등학교 5학년인 우리들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가르칠려고 노력하셨다. 그 내용들이 시험에 나오고 성적에 도움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먼저, 우리의 역사와 뿌리에 대해서 항상 이야기 하시고 우리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키워주시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하셨다. 또한 학생들과 같이 어울리고 의사소통 하면서 학생들을 이해하고 존중해 주면서 비록 어린 12살의 학생들 이었지만, 책임감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할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한 예로, 5학년 2반안에서 해야하는 일을 학생 수 만큼 나누어서 개개인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학년이 끝날 때 까지 책임을 다한 몇 안되는 학생들에게는 상을 주기도 하였다. 이 이야기를 하면 ‘어, 어디 방송에 나왔던 내용 아니냐?’고 반문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나도 그 내용이 담긴 드라마를 보고 깜짝 놀랐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또한 선생님은 우리들이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도록 학급 자체적으로 많은 학예회를 열고 팀을 구성해서 팀웍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셨다.

 
선생님은 학교안에서만의 선생님이 아니였다. 학교 안에서나 밖에서나 우리 5학년 2반 학생들에게는 언제나 우리를 돌봐주시는 분이셨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있으면, 소리소문 없이 그 학생이 편안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이것도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다.) 선생님 당신의 형편도 좋지 않으시면서 말이다.
 
 한번은 쉬는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이 무척이나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고, 멀리서부터 그 소리를 들으셨던지 무척이나 화가 난 얼굴로 교실에 들어오셨고, 누가 큰 소리로 떠들었냐고 물으셨고, 아무도 대답이 없자 모두 책상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떠든 사람이 나올 때 까지 벌을 서게 하겠다고 하셨다. 한 30여분이 흘렀을까, 우리반에서 제일 조용한 친구 한명이 조용히 손을 들고 나가서 자기가 소리내어 떠들었다고 하였다. 우리들은 당연히 그 아이는 떠들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다시 자리에 앉게 하시고는 그 주의 반장(대의원 제도가 있어서 반장을 주기적으로 번갈아서 하고 있었다.)과 부반장을 앞으로 불러서 어린 손에 회초리를 쥐어주시고선 잘못 가르친 선생님의 죄가 크니 선생님의 종아리를 때리라고 하셨다. 앞에 나간 반장과 부반장은 당연히 선생님을 때릴 수 없었고, 회초리를 다시 드신 선생님은 당신의 종아리를 딱! 딱! 소리가 날 정도로 있는 힘껏 때리셨다. 선생님의 종아리에는 회초리 주국과 핏자국이 선명하게 났고 반의 아이들은 흘러 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그 후로 어떤일이건 서로간의 잘못을 감싸주고 잘잘못을 남에게 미루는 일은 절 때 없었다. 혹시나 우연으로라도 자신을 때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엄청난 각오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선생님은 당신을 희생해서라도 우리들이 바른 사람이 될 수 있는길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여담으로 한달에 한번 씩 짝지를 정하는 투표를 했었다. 자신이 원하는 이성의 이름을 1위부터 10위까지 적어서 내면, 서로에 대한 이름의 합이 가장 적은 짝부터 해서 짝지를 정하곤 하였다. 요즘 학교에서는 어떤 식으로 자리를 정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엔 획기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짝지 정하기 방법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근처에 중학교를 갔던 난 한동네에서 살아서 그런지 선생님을 자주 뵐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멀리 고등학교를 가면서 찾아뵙지 못하다가 수능을 치고서야 선생님을 찾아 갈 수 있었다. 선생님을 찾아가기전에 선생님께서 암에 걸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몇 년만에 찾아 뵈었을 때는 원래 없던 살에 더 말라서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걸 참느라 혼이 났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대학교에 있을 때 암투병 중에서도 끝까지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던 선생님께서 돌아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40대에...토끼같은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둔채... 난 아직도 선생님을 생각하면 내 눈가로 흐르는 눈물을 느낀다. 선생님이 살아 계실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설마 설마 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생전에 찾아뵈지 못한 죄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로부터 또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선생님의 묘소에 조차 찾아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이글을 적으면서도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죄송스러움 때문인지 눈가에 맺힌 눈물방을을 느낀다. 
 
 그 누구 보다도 학생들을 사랑하고,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나 기술의 전수가 아닌 우리나라에 대한 애국심과 우리의 뿌리를 알게 해주셨고, 돌아 가시는 그 순간까지 당신의 집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을지언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주셨고, 학생들이 스스로 책임감을 가지고 타의가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게 해주셨던 우리 선생님, 난 이런 선생님을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만나 본적이 없었다. 내 삶의 전화점이 되어 주셨고,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의 밑거름을 쌓아주신 우리 선생님... 스승의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니 문득 생각이 나고, 학생들과 서생님들 사이에 발생하는 듣기 불편한 기사들이 판치는 뉴스를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짐을 느낀다.
 "이글을 읽은 분들과 약속을 하고라도 올해는 무슨일이 있어도 선생님의 산소를 꼭 찾아가봐야 겠다." 

P.s : 선생님을 성함을 밝히지 않은 건, 돌아가신 선생님께 혹시나 누가 될까 봐도 그렇지만
        선생님에게 너무 못난 제자인 내가 하늘같은 스승님의 성함을 차마 부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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