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어릴적 부모님과 함께 찾았던 다산초당, 사실 다산초당에 대한 기역이 머리속에 남아 있지 않다. 관심이 없을때 찾아서 그런건지, 너무 오래전 이라서 그런건지는 모르겠다. 오랜만에 찾은 다산초당은 주차장에서 올라갈때 부터 고난(?) 이었다. 30도가 넘는 날씨탓에 땀을 비오듯 흘리며 20~30분을 걸어 올라갔다. 시원한 나무슾 아래 자리잡은 다산초당의 자리는 정말 좋아 보였다. 저 멀리는 시원한 바다가 보이고, 살랑살랑 기분좋은 바람도 부는 산 중턱에 위치한 다산초당은 바람에 실려온 향기를 찾아나선 이들에게는 안성맞춤인 곳임에 분명했다.
주차장에서 내리지 마자 눈에 보인 건물은 기념관 이었다. 다산 정약용과 그 주변인물에 대한 다양한 작품에 대한 전시를 하는데 입장료는 무료이기 때문에 부담없이 구경할 수 있다.
다산 초당으로 가는길은 곳곳이 나무로 그늘져 있어서 뜨거운 햇빛을 조금씩은 피하면서 갈 수 있게 만들어 두었다. 여유를 느끼면서 기분좋은 자연의 바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다산초당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차가 참 많은 곳이라곤 한다. 차에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서 구분은 가지 않지만 사진에 나온 곳은 자연 차밭이라고 한다.
다산초당의 현판과 다산초당의 전체모습이다. 사실 다산초당을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이 사진을 본다면 적지않게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건물 하나 딸랑 서 있는데 왜 저게 유명한거야 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어~"하고 말할지도 모르는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산 초당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단순한 건물 하나로써의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천재 학자 정약용이 머물렀던 곳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하겠다.
다산초당의 3칸중에 중간에는 다산 정약용의 초상화가 놓여져 있다. 1000원을 내면 저 방에서 맛좋은 차를 마실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팸투어의 일환으로 다산초당을 찾었던 난 따스하면서도 느낌만은 시원한 차한잔을 마시며 여유를 느껴볼 수 있었다.
다산초당의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 '연지석가산'이다. 1808년 이 곳으로 이주한 다산 선생께서 바닷가의 돌을 가져다가 만든 연못이다.
다산초당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가면 저 멀리 바다까지 대나볼 수 있는 '천일각'이 위치하고 있다. 흑산도로 유배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심회를 달래던 곳으로 정면과 측면이 한칸씩인 누각이다. 날씨가 좋은날엔 완도쪽의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산 정약용의 친필을 모각한 '다산동암'이란 현편이 달린 동암 건물이다.
초당의 서쪽 뒤편에는 유배가 끝나면서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서 다산 선생께서 직접 '丁石'이란 글씨를 새긴 정석바위가 있다.
다산 선생이 머물던 시절 차를 마시던 돌상(?) 다조이다.
다산초당에서는 2가지 체험을 할 수 있다. 옛 선비들이 유배시절 입었던 옷을입고 붓글씨 체험을 할 수 있고, 간단한 다도 체험도 할 수 있다.
다산 기념관의 뒤쪽에는 다산 정약용의 말씀의 숲이있다. 이곳에는 다산 선생의 동상을 비롯해 정약용 최고의 작품이라 불리는 거중기의 전도도 그려져 있고, 다산 선생의 말씀들을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돌에 새긴 것들도 있다. 초등학생부터, 전 대통령, 추기경 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다산 전시관에는 정약용에 관련된 것들뿐만 아니라 그의 뛰어난 제자들과 관련된 전시물 등도 상당 수 있다. 전시관을 가득 메운 다양한 전시물들을 카메라에 담아보았다.
여러가지 유물중에 유일하게 기역에 남은 것은 사진에 보이는 '제경'이었다. 제경은 다산이 '효경','소학'등에서 아동들이 가져야 할 예의범절을 담은 구절을 뽑아모은 윤리교과서로, 강진 제자 윤시유가 친필로 옮기고 이청이 발문을 써 강진에서 교재로 널리 쓰였음을 보여준다.
정약용의 거중기를 모형과 그것을 통해서 수원화성을 만드는 모습을 인형과 함께 재현해 두었다. 인형의 행동하나하나 잘 표현되어 있어서 클로즈업 해서 찍어 보았다.
바람에 실려온 향기를 찾아서 가본 다산초당은 머리속에서 거의 사라져간 기역속의 생각과는 사뭇 다른 곳이었다. 한적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주는 나무슾 사이에 위치한 다산 초당, 일정성 시간이 부족해서 주변의 경관을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해월루까지 가보지 못한것은 아쉬운 점으로 남지만 다산 선생이 왜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장소였던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