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내 마음 한 구석이 괜스레 저며 온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큰 하늘을 품고 그보다 더 큰 마음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던 한 사람.
단풍이 붉디붉은 것은 생의 마지막 힘을 다해 죽어가는 것이라 했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단풍잎처럼 그 분도 그렇게 가셨다.
1993년, 열두 살의 봄날이었다.
학생회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학년이 된 것이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왠지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괜스레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고개도 빳빳해지던 순간, 교실 앞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뜻 봐도 학생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엄청나게 마른체구를 가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얼굴의 반은 덮을 것 같은 커다란 눈, 붉게 상기된 얼굴로 수줍게 웃는 모습까지 누가 봐도 그저 친구 같았다. 그런데 그 분이 담임선생님이라니!
사실 선생님의 첫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선생님의 위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볼품없어 보이는 모습 때문이었는지, 5학년의 눈에도 선생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왜소한 체구 때문이었는지, 그 어린 마음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당시 대부분 친구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게 나와 선생님은 어색한 인연을 맺었고, 평생 잊지 못할, 아니 잊고 싶지 않은 새로운 학년이 시작됐다.
흩날리는 벚꽃처럼 열두 살의 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하루, 이틀, 그리고 한 달, 두 달이 흘러가면서 나는 내 심장이 고장 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이상하게 학교에 가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선생님과의 하루하루가 설렘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괜스레 장난만 거는 첫사랑 그녀가 나를 바라봐주기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떨리기까지 했다.
대체 이게 문슨 감정이란 말인가.
선생님은 우리를 학생으로 대하지 않으셨다. 그저 아들로, 딸로 생각하시는 마음이 그 어린 개구쟁이들에게도 전해질 정도였으니 그 마음의 크기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던 한마디, 한마디는 아직도 내 삶의 중심에서 내가 방황할 때마다 큰 파문을 던져주고 있다.
우리의 뿌리와 역사, 나라사랑하는 마음까지 심어주려고 노력하셨던 선생님.
이 땅에 태어나고 자라나 미래의 주역이 될 어린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깨우쳐주려고 하셨던 그 분의 혜안이 깊고도 넓어 감히 말할 수 조차 없다. 어쩌면 내가 육군사관학교를 선택한 것도 선생님이 심어주신 잠재의식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가르침이 시험에 나오고 성적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몇몇 단어 달달 외워서 치루는 시험 속 정답들, 지금 기억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중요할 뿐.
덕분에, 감히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은 열두 살의 학교생활은 참으로 꿀맛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성적이 우선시되는 학교생활이지만, 선생님은 그 숫자놀음에 연연해하지 않으셨다. 그 결과 우리 반은 항상 꼴등을 했고, 선생님은 교장선생님께 늘 불려가 야단을 맞으셨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봄날, 우리 반이 꼴등을 했다고 해서 친구들의 인생 또한 꼴등일 수는 없었다. 혀를 녹일 듯한 달콤한 꿀맛도 가짜가 아닌, 진짜 꿀이었기에 그 깊은 여운이 아직도 맴도는 게 아닐까.
선생님의 뜨거운 에피소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선생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아버지의 마음이요, 친구의 마음이었다.
철부지 열두 살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존중해주시는 그 마음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비로소 철이 들었다.
학년 초, 우리반에서 해야 할 일을 학생 수만큼 나누어 개개인에게 임무를 부여한 일이 있었다. 1년 동안 해야 할 장기적인 프로젝트 앞에 나도, 친구들도 차츰 그 임무를 소흘히 하거나 잊어가고 있던 즈음, 학년 말이 다가왔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끝까지 해낸 친구는 단 한 명.
다른 반에선 의례히 반장에게 주는 단 한 장의 상을 선생님은 그 친구에세 주셨다. 우리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선생님이 주신 일을 완수하지 못한데 대한 부끄러움이 앞섰을 뿐이었다.
열두 살에 붙어 닥친 따뜻하고 감미로운 바람은 내 눈을, 내 마음을 틔워주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제자들의 잘못을 가르치기 위해 선생님 스스로 회초리를 때리는 이야기.
하지만, 내겐 드라마도, 영화도 아니다.
오롯이 나의 추억이요, 나의 눈물이다.
그날, 선생님의 가녀린 종아리에는 핏빛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아이들의 놀란 눈물로도 지울 수 없는 그 상처는 그 무엇보다 큰 울림으로 다가왔고, 그 일이 있은 뒤로 아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친구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나의 초등학교 기억은 너무나 아름답고 눈부셨던 열두살, 그 해에서 멈췄다.
6학년이 되었지만, 그동안 꿈을 꿨나 싶을 정도로 다시금 갑갑한 학교생활이 시작됐다.
어렴풋이 졸업을 하고,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난 가끔 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 한 동네에 사는 이웃사촌으로서 말이다.
그러다 바람결에 아픈 소식을 들었다.
선생님이 암에 걸리셨다는 거였다.
수능시험을 치룬 후, 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안 그래도 왜소한 체구가 살점 하나 없이 깡말라버린 모습에 난 할 말을 잃었다. 눈이 아릴만큼 뜨거운 물이 고였다. 하지만 그 아픈 물을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선생님은 늘 그랬던 것처럼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주셧다.
그리고 몇 년 후, 선생님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셨다는 걸 들었다.
암 투병 중에도 끝까지 교단을 지키셨다고, 당신 몸보다 제자들을 더 걱정하셨다고.
생의 마지막 끈을 놓는 그 순간까지도 당신의 집에 남아 있는 것이 없을지언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몰래 도와주셨고, 아이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끝없는 마음으로 지탱해주셨던 나의 선생님.
난 그전에도, 그 후에도 '선생님'을 만나본 적이 없다.
선생님은 내 삶의 밑거름이었고, 전환점이었다.
당신의 말 한마디로 힘겨운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 당신의 환한 웃음으로 내 심장이 떨림을 아직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을 움켜쥐고 살면서도 난 죄가 많은 제자다.
선생님이 남은 생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서도 설마설마 하는 마음과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했고, 그 후로도 벌초 한 번 못 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길러낸 수많은 제자들 중 하나였다는 것이 사무치도록 자랑스럽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내가 온전히 받을 수 있었음에 감사드린다.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