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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의 현대판 피라미드 무덤

Travel Story./2004. 이집트

by 멀티라이프 2009. 12. 12.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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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 여행중에 카이로에서 길을 지나가다 피라미드모양의 구조물이 보여서 잠시 들려본 곳이 있었다. 알고보니 이름도 유명한 정치가이자 이집트의 대통령을 지낸 사다트의 무덤이었다. 현대에서 개인의 무덤으로써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무덤을 보는 순간 현대판 피라미드가 생겨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집트의 근현대사에서 사다트가 이루어낸 여러가지 업적을 생각한다면 조금 과한듯 하지만 어느정도는 엄청난 규모의 잘 갖추어진 무덤이 이해가 되기도 하였다.

사다트(이집트 대통령), 이집트의 육군장교ㆍ정치가
1918.12.25 ~ 1981.10.6 
 197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이집트 대통령을 지냈다. 1938년 카이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중 독일의 도움을 받아 영국을 이집트에서 몰아내려는 비밀활동을 했다. 1942년 영국은 그를 체포·투옥했으나 탈출했다. 1950년 가말 아브델 나세르가 지도하던 자유장교단에 가입하여 1952년 왕정전복 군사 쿠데타에 가담했고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나세르를 지지했다. 사다트는 여러 고위관직을 거쳐 부통령을 역임했다(1964~66, 1969~70). 1970년 9월 28일 나세르가 사망하자 임시대통령이 되었으며 10월 15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국내정책에는 탈중앙집중화, 경제의 다양화, 정치구조의 완화 등이 포함되었다.
 사다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는 대외관계였다. 이스라엘과 계속 대치하고 있던 이집트에 소련이 충분히 원조하지 않는다고 느낀 그는 1972년 수천 명의 소련 기술자와 고문을 추방했다. 이듬해 10월 시리아와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함으로써 아랍-이스라엘 전쟁을 일으켰다. 이집트 육군은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던 시나이 반도에 대한 전술적 기습공격에 성공했다. 비록 이스라엘이 반격에 나섰지만 사다트는 이스라엘로부터 조금의 영토나마 실질적으로 되찾은 최초의 아랍 지도자로서 자신의 위신을 세우며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전쟁 뒤 사다트는 중동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1977년 11월 19~20일 역사적인 이스라엘 방문기간중 예루살렘의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에서 평화정착을 위한 자신의 계획을 내놓았다. 이것은 대다수 아랍권과 소련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해서 벌인 일련의 외교적 노력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1978년 이스라엘 수상 메나힘 베긴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그들의 계속된 정치적 협상 결과 1979년 3월 26일 아랍권에서는 최초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서방세계에서는 사다트의 인기가 올라갔으나 국내에서는 조약반대, 경제위기 악화, 그결과 생겨난 반대여론에 대한 탄압 등으로 인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그는 1981년 10월 아랍-이스라엘 전쟁기념식에서 사열하던 중 회교극단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1978년 자서전 〈주체성을 찾아서 In Search of Identity〉가 출판되었다.
출처 : 브래태니커 백과사전


 양쪽으로 이집트 군인들이 삼엄하게 무덤을 지키고 있다. 과도하게 떠들지만 않으면 큰 제약없이 모든곳을 둘러볼 수 있다. 무덤앞쪽으로 깔린 대리석을 얼마나 잘 닦아두었으면, 피라미드의 모양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다. 아무리 봐도 현대판 피라미드라고 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피라미드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크기를 생각해보면 이 피라미드 무덤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으리라.


피라미드에서 바라본 길 반대편의 모습이다. 여러가지 국가적인 행사가 개최되는 장소라고 한다.


사다트 대통령의 무덤을 지키고 있는 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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