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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역사의 현장, 충주 탄금대

Travel Story./충청도

by 멀티라이프 2009. 9. 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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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시 칠금도에 위치한 명승 제42호 탄금대를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은 1,400여년전 우륵이 살면서 가야금을 타던 곳으로 생각한다. 물론 탄금대라 불리게 된 이유가 우륵의 미묘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 부락을 이루었고, 그 연유로 탄금대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으니, 탄금대 하면 우륵과 가야금을 생각하는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우륵이 아름다움에 취해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좋겠지만 지나간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에서 있어던 슬픈 역사를 생각해 보는것도 좋지 않을까...

 『탄금대 전투관련 이야기는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에 저의 개인적인 의견(밑줄친 부분)이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곳 탄금대는 임진왜란 당시 도순변사 신립장군이 8,000여명의 군졸과 함께 배수진을 치고 왜장 가또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끼나가의 군대를 맞아 격전을 한 격전지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순변사가 되어 선조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고 김여물등의 군관과 함께 모집한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다. 충주에 진을 치고 있을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이 새재를 넘어 충주에서 6~7리 떨어진 단월역까지 들어왔다. 이때 김여물은 조선군의 수가 일본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인 만큼 조령의 협곡을 이용하여 기습작전을 할 것을 신립에게 권했다. 그러나 신립은 일본군이 보병인데 반해 아군은 기병이므로 기병력을 이용할 수 있는 평지에서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그래서 탄금대를 피로 물들인 탄금대 전투가 서막을 열었던 것이다. 신립장군은 왜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맞이하여 김여물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수의 진이라는 극단적인 전략을 선택했을까?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다. 당시 신립이 거닐고 있던 군졸은 8,000여명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이 훈련이 되지 않은 평범한 농사꾼들 이었다. 이들이 과연 수 많은 적을 뒤로 하고 조령까지 빠른시간안에 이동이 가능했을가? 그리고 배수의 진이라는 방법이 아니라면 이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왜군과 맞서 싸울 수 있었을까? 지나간 역사에 대해서 판단을 한다는건 위험한 일이지만, 아마도 신립장군은 왜군과 맞서서 최고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이 배수의 진이라고 생각하였나 보다. 물론 조총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사실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신립장군과 그의 군졸들은 거의 대부분이 죽음에 이르면 처첨한 패배를 한다. 이에 신립장군과 김여물은 끝까지 싸우다 자결을 했다. 탄금대 전투는 부산 동래에서 조금 싸우는듯 한 후에 충주까지 폭풍처럼 진격해 오던 왜군을 멈추게 했다는 점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무기와 수의 열세속에 정말 제대로 싸운 전투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한다. 얼마나 치열한 전투였던지 탄금대 전투이후 왜군은 바로 북상하지 못하고 2일이나 휴식을 취한뒤에야 다시금 출발했다.


가벼운 런닝과 운동하기에도 좋은 탄금대 공원의 안내도... 많은 지역의 시민들이 운동을 하고 편하게 산책을 하로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우람한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사람들이 산책과 가벼운 조깅을 이곳에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나보다.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길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다양한 조각상들, 거의 모든 조각상들이 누드 조각상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탄금대의 사연이 담긴 노래비도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고...


이 곳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을 위한 충혼탑이 서 있다. 잘 지어진 충혼탑이 푸른하늘과 나무들 사이에서 멋지게 서있는데 왠지 모를 슬픔이 밀려오는 곳이다.


충장공 신립장군과 8천여명의 혼을 기리닌 위령탑도 충혼탑 뒤쪽으로 자리를 잡고, 우륵의 가야금 연주만을 생각하고 이 곳을 찾은 많은 여행객들에게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해준다.


독립운동가 동천 권태응 선생의 작품 '감자꽃'을 비석으로 만들어 두었다. 권태응 선생이 남긴 대부분의 시가 애국적 내용을 담고 있으며 '감자꽃'도 일제의 창씨개명에 맞선 작품이라는 평이 있는데, 동시인 만큼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정부에서는 권태응 선생은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하여 2005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기도 하였다.


사진에 보이는 바위 덩어리가 바로 12두대 이다. 어떤 이들은 우륵이 연주하던 가야금이 12줄이라서 12두대 라는 명칭이 붙었다고도 하지만, 알고보면 탄금대전투 당시 왜군에 맞서 싸우던 신립장군이 수 없이 활시위를 당기면서 달구어진 활시위를 식히기 위해서 이 12두대 바위 절벽을 12번이나 오르락 내리락 했다는데서 12두대 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당시의 전투가 얼마나 긴박하고 나라를 위해 온몸을 던지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아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닌가 한다. 이곳 12두대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면 아름다운 광경의 펼쳐진다. 아마도 우륵이 이곳에서 가야금일 연주한것도 이 때문 이리라.


탄금대에는 슬픈 역사의 흔적도 있지만, 역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우륵과 가야금이다. 탄금대 공원 여러지역에서 마음이 가는대로 앉아서 연주를 하여서 특별히 연주를 하던 장소가 있는 것은 아니나 어느 한곳에 이렇게 우륵의 벽화가 담긴 비석을 세워두었다.


12두대 근처에는 이런 전망대가 있다. 그런데,,, 전망대 주변으로 나무들이 너무 커버려서 전망대에 올라도 주변 경관이 잘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12두대에 올라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면 된다.


이 곳은 슬픈 역사의 모습과 아름다운 우륵의 가야금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을 위한 평범한 공원이기도 하다. 한쪽에는 사찰로 보이는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고, 길 가에는 청솔모 한마리가 뛰어 놀기도 한다. 

 아름다운 우륵의 가야금과 슬픈 역사인 탄금대 전투가 공존하고 있는 탄금대 공원에서 여유를 가지고 아름다움과 지나간 역사에 대한 아쉬움을 함께 느껴 보는 것도 좋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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