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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랜 500년의 역사 간직한 향약, '태인 고현동 향약'

Travel Story./국립중앙박물관

by 멀티라이프 2009. 11. 25.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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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사회는 일과 사물들에 이름붙이기를 참 좋아한다. 가장 큰, 가장 작은, 가장 많은 등 뭐든지 1등(?)을 매우 중요시 한다. 그래서 가장 큰 휴대폰부터 가장 큰 의자 등 다양한 기네스북에 오르는 다양한 물건들이 탄생했다. 가장 크거나 가장 작은 것 등은 현재의 우리가 얼마든지 시간과 노력과 돈만 들이면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시간과 돈이 있다고 해도 절대로 붙일 수 있는 수식어가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가장 오래되었다는 말이다. 역사와 역사속 조상들이 만들어낸 가장 오랜이라는 말이 붙는 것들은 그것이 유형의 형태이건 무형의 형태이건 소중한 것들임에 틀림없다. 그런 소중한 것들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향약 '태인 고현동 향약'에 대한 전시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어서 찾아가 보았다.

 테마전 '500여 년의 마을 약속 - 태인 고현동 향약'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진행한 역사문화유산 조사사업의 첫 번째 성과를 공개하는 전시이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할 유물은 '태인 고현동 향약(보물 1181호)'이다. 고현동 향약은 성종 6년(1475) 정극인이 처음으로 시행한 이래 500여 년 동안 태인현 고현동에서 꾸준히 운영되어 왔다. 15ㆍ16세기의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선조 35년(1602)부터 1977년까지 400여 년간의 자료가 남아 보존되어 있다. 이 향약은 풍부한 관련 문서와 함께 500여 년간 계승되어온 유례가 드문 사례이다.  
※ 태인 고현동은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다.



 이번 테마전에 붙여진 이름이 참 마음에 든다. 500여 년의 마을 약속,,, 역사속 우리 조상들의 노력이 제목 하나에 다 들어있는 듯 하다. 



 칠광도의 전체모습과 그림 중 정자라애 자리잡고 있는 칠광의 모습을 클로즈업해서 잡아본 모습이다. 광해군의 정치에 대한 반발로 거짓으로 미친척며 태인 고현동으로 낙향한 7명의 선비, '칠광(七狂)'을 기리고자 그린 그림이다. 고현동의 상징인 시산과 성황산을 배경으로 한 마을의 여러문화유산과 성황산 중턱 송정부근의 칠광이 표현되어있다. 정치의 칼 바람속에서 미친척을 하며 소용돌이속으로 들어가지 않은 칠광의 행동은 현명한 선택이였을까, 안타까운 선택이였을까..


 향약에 사용된 제기들...


 보물 1181호인 태인고현동 향약은 1602~1977년간 작성되어 총 29책이 남아있다. 사진속의 문서는 현존하는 고현동 향약 중 가장 오래된 문서 '동안(洞案)'이다. 선조 35년(1602)에 작성되었다. 이 문서에는 향약 구성원 명다단인 좌목, 정극인과 송세림이 쓴 향음주례에 관한서문과 발문이 실려 있다. 이 두글은 이후 고현동 향약 문서에 대부분 실려 있다. 이는 고현동 향약을 세우고 정착시킨 정극인과 송세림의 행약 정신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고현동약좌목'으로 숙종 9년(1683)에 작성되었다. 이 책에는 향약 참여자와 명단인 좌목, 정극인ㆍ송세림의 서문과 발문이 실려있으며, 20개의 향약 규약이 적혀 있다. 이 규약에 의하면, 양반이 아닌 중서층(중인 또는 서얼)이 향약에 들어가기 시작하고 있다.


 숙종 30년(1704)에 만들어진 '동계좌목'이다. 이 책에는 속종 24년ㆍ27년에 다시 만들어진 동안 그리고 숙종 30년에 만들어진 고현동계좌목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고현동계좌목에는 양반으로 구성된 상계와 일반 백성으로 구성된 하계의 명단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시기부터 백성들이 향약에 참여하고 있다.


 고현향약안으로 순조 1년(1801)에 작성되었다. 이 책에는 당시 태인 현감 서유응이 향촌사회를 안정시키려는 정조의 뜻에 따라 향약을 진흥시키려고 하였다. 이 향약은 수령의 서명과 관인이 찍혀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의 향약과 성격이 다소 다르다.


 이 밖에도 많은 관련 문서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오른쪽부터 동중좌목(1666), 동안(1713), 동학당수계안(1854), 고현동약안(1974).



 '송정수계지도' 라는 그림이다. 태인 선비들이 송정에서 계를 만든 것을 기념한 그림이 되겠다. 그림에는 술상 주위로 둘러 앉아 있는 계 모임의주인공인 10명의 선비들, 술독ㆍ술상 등의 시종을 드는 사람들, 당나귀와 마부 등이 소나무 아래에 나오고 있다. 그리고 냇가 동쪽에는 이 모임을 찾아오는 듯한 선비 일행이 보인다. 그림의 아래 부분은 선비를 상징하는 대나무와 매화 사이로 계모임을 하였던 사람의 명단을 적었다. 즉, 광해군 13년(1621)에 열명의 참석자 이름을 적었다.  



 고현동 내 송정에 모여 있는 열 명의 현인을 그린 그림인 '송정십현도(松亭十賢圖)'이다. 광해군 10년(1618)에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두자, 태인 고현동의 일부 선비들이 이에 항의 하였지만 그들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태인 고현동 성황산의 송정을 중심으로 모임을 갖고 시문으로 마음을 달랬다. 이들은 이른바 일곱 명의 거짓 미치광이라는 뜻의 '7광'또는 10인의 어진사람 이라는 뜻의 10현이라고도 불리었다. 이후 7광 10현의 후손들은 이들의 사적을 후대에 길이 전하고자 '송정십현도' 또는 앞에 소개한 '칠광도'등을 그렸다. 이 그림은 송정의 뒤편에 지은 영모당에 보관되어 오늘날까지 봄ㆍ가을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되고 있다.


 태인현의 성황사안에 모셔져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함 그리고 수복등을 기원하였던 성황(고을의 수호신) 신상이다. 태인현의 성황사 신상은 조선시대 어느 시기부터 태인 현감으로 선정을 펼친 신잠과 그 가족의 상으로 변경되어 신앙 대상이 되었다.


 고현동 안 무성서원 사당 태산사에 봉안된 최치원의 초상화이다. 20세기초 채용신이 다시 그린 그림이 되겠다.
 

 이번 전시가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생활상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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