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는 전등사, 보문사, 정수사, 적석사 등 생각보다 많은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을 꼽으라면 아마도 전등사와 보문사가 살며시 얼굴을 내밀것이다. 그래서 지난 일요일 강화도를 찾았을때 배를 타고 한번더 들어가야 하는 보문사는 포기하고 전등사를 찾았다. 전등사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안에 자리잡고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진종사라고 했으나 고려 충렬왕 때, 정화공주가 옥등을 이 절에 바친 후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전등사는 외침이 있을 때 정족사고를 지키는 사찰로서 국방의 임무도 담당했었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의 문화재가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일명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는 삼랑성은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하고 이름을 삼람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고려, 조선시대에 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다. 병인양요 때(1866)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인 선원보를 지켜냈다. 1976년에는 남문이 종해루를 원형대로 복원했다. 위 첫번째 사진이 종해루의 모습이다.
1866년 병인영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다. 승전비에는 양헌수를 비롯한 367명이 프랑스군대를 맞아 활약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전등사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운 누각식 건물인 대조루이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말 대학자 목은 이색의 '전등사시'에서 대조루를 읊은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에는 이미 대조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사찰 안의 건물들을 수리하면서 대조루도 다시 지었다고 한다.
보물 제 178호인 대웅전으로 조선광해군 13년(1621)에 다시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건물로,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인 공포가 기둥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기둥은 가운데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여 안정감을 주었으며, 네 모서리 기둥 윗 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것은 절은 짓던 목수가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 것으로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이날 전등사는 구경하기엔 최악의 조건이었다. 쌓여있던 눈이 녹아서 모든것이 진흙투성이었다. 그래서 제법 위쪽에 있는 정족사고에는 올라가보지 못하고 말았다.
보물 제 479호인 약사전은 중생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조선 고종 13년(1876) 대웅전과 함께 기와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보일 뿐 언제 지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건축양식이 대웅전과 비슷하여 조선 중기 건물로 짐작하고 있다.
전등사 범종은 보물 제 393호로 중국 송나라 때(1097) 회주 숭명사에서 무쇠로 만든 중국종이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병기를 만들려고 부평 병기창에 갖다 놓은 것을 광복 후에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종의 정상부에는 두 마리 용으로 이루어진 종고리가 있고, 몸통 위 부분에는 8괘가 있으며, 그 밑으로 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8개의 정사각형을 둘렀다. 이 정사각형 안에는 명문을 새겼는데,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 철종 4년(1097)에 주조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전등사는 건물들이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어서 꽃피는 봄에 오면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일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전등사에게는 미안하지만, 전통찻집이었다. 잘 꾸며진 작은 정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전통찻집에서 차한잔의 여유를 즐기면 근심걱정이 다 사라질것만 같았다.